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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시앵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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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뤼시앵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으로, 프랑스 혁명 시기 자코뱅 클럽에서 활동하며 혁명을 지지했다. 그는 오백인회 의장,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통해 형의 집권을 도왔으나, 나폴레옹과 갈등을 겪고 스페인 대사로 파견되었다. 이후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와 정략결혼 시도에 반발하여 망명 생활을 했으며, 학문 활동과 고고학 연구에도 기여했다. 말년에는 나폴레옹의 백일천하에 동참했으나 부르봉 왕정복고 이후 추방되었고, 1840년 이탈리아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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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시앵 보나파르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프랑수아-자비에르 파브르의 초상화, 1808년
프랑수아-자비에르 파브르의 초상화, 1808년
존칭 접미사카니노와 무시냐노 공작
출생일1775년 5월 21일
출생지아작시오, 코르시카, 프랑스
사망일1840년 6월 29일
사망지비테르보, 교황령
배우자크리스틴 보이어 (1794년 결혼, 1800년 사망)
알렉상드린 드 블레샹 (1802년 결혼)
아버지카를로 부오나파르테
어머니레티치아 라몰리노
서명
정치 경력
내무부 장관재임 기간: 1799년 12월 25일 – 1800년 11월 7일
이전: 피에르-시몽 라플라스
이후: 장-앙투안 샬프탈
오백인회 의장재임 기간: 1799년 10월 23일 – 1799년 11월 12일
이전: 장-피에르 샤잘
이후: 앙투안 불레 드 라 뫼르트
오백인회 의원 (리아모네 선거구)재임 기간: 1798년 4월 12일 – 1799년 12월 26일

2. 초기 생애 및 혁명 활동

뤼시앵 보나파르트는 1775년 5월 21일 코르시카의 아작시오에서 샤를 마리 보나파르트와 마리아 레티치아 보나파르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본토로 건너가 오텬의 대학교(1783년)와 브리엔르샤토의 군사 학교(1784년 입학)에서 교육을 받았으나 군사 학교는 중퇴했다. 이후 1786년 엑상프로방스의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1789년에 자퇴했다.[1]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14세의 나이로 혁명을 열렬히 지지하게 되었다.[2] 혁명 초기 코르시카로 돌아가 아작시오의 자코뱅 클럽에서 활동하며 정치에 입문했고,[2][1] 이후 코르시카 지도자 파스콸레 파올리와의 정치적 갈등 끝에 1793년 5월 가족과 함께 코르시카에서 추방당해 프랑스 본토로 이주했다.[2]

프랑스 본토로 이주한 후 1793년부터 1795년까지 여러 행정직을 맡았으나,[1]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 시기에는 과거 자코뱅 활동 이력으로 인해 잠시 투옥되기도 했다.[1] 그는 형 나폴레옹의 개입으로 석방되어 북부군에서 행정 업무를 맡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1]

2. 1. 코르시카에서의 활동

뤼시앵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14세의 나이로 이를 강력하게 지지했다.[2] 혁명이 시작될 무렵 코르시카로 돌아가 아작시오에 있는 자코뱅 클럽 지부에서 활동하며 열정적인 연설가로 이름을 알렸고, 이때 고대 로마 공화정의 수호자로 유명한 브루투스의 이름을 따 "브루투스 보나파르트"라는 가명을 사용하기도 했다.[2][1]

1791년에는 코르시카의 민족주의 지도자 파스콸레 파올리의 비서가 되었으나,[2] 파올리가 혁명 정부와 대립하게 되자 뤼시앵은 정치 클럽 '공화국 협회'에서 파올리를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이 협회는 파올리의 즉각적인 해임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국민공회에 보냈고, 공회는 이를 받아들여 파올리 체포령을 내렸다. 1793년 5월, 뤼시앵은 형 나폴레옹과 함께 파올리와 최종적으로 결별했다.[2] 이후 파올리 지지자들과의 갈등 및 무력 충돌 끝에 뤼시앵과 그의 가족은 코르시카에서 추방되어 프랑스 본토로 이주해야 했다.

2. 2. 프랑스 본토에서의 활동

1792년 프랑스 본토로 이주한 후, 생-막시맹-라-생트-봄 마을의 식량 창고 관리 책임자를 맡으며 인민 협의회 의장이 되었다. 이때 일시적으로 자신을 '브루투스'라고 칭하기도 했다.[2][1]

뤼시앵은 1793년부터 1795년까지 여러 행정직을 거쳤다.[1] 그러나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테르미도르 9일 쿠데타)의 여파로 과거 자코뱅 활동 이력 때문에 엑상프로방스에서 잠시 투옥되었다.[1] 그는 형 나폴레옹의 개입과 도움으로 곧 석방될 수 있었고,[1] 이후 나폴레옹의 지시로 북부군에서 행정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1]

3. 정치 경력

뤼시앵 보나파르트는 1798년 코르시카의 리아모네 도 대표로 오백인회 의원에 선출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1] 초기에는 신-자코뱅파와 노선을 같이하며 프레리알 30일 쿠데타에도 참여했으나, 이후 형 나폴레옹이 주도한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에서 오백인회 의장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통령 정부를 수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1]

통령 정부 수립 후 1799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초기 행정 체계 구축에 관여했다.[1] 그러나 경찰권 문제를 둘러싸고 조제프 푸셰와 갈등을 겪고 나폴레옹과의 의견 충돌이 심화되면서 1800년 장관직에서 사임했다.[1][3] 사임 후 스페인 주재 대사로 파견되어 1801년 아란후에스 조약 체결과 같은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으며,[4][1] 이후 호민원과 원로원 의원을 역임했다.

하지만 1803년 알렉상드린 자코브 드 브레샹과의 재혼 문제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과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나폴레옹은 이 결혼을 반대하며 뤼시앵에게 이혼과 정략결혼을 강요했으나, 뤼시앵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로 인해 1804년 황위 계승권을 박탈당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후 이탈리아, 영국 등지로 이주했으며, 미국으로 가려던 중 영국에 억류되기도 했다. 1815년 백일천하 시기에는 잠시 귀국하여 나폴레옹을 도왔다. 나폴레옹의 최종 몰락 후 다시 이탈리아로 이주하여 비테르보에서 1840년 사망했다.

3. 1. 오백인회 의원 및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1798년, 뤼시앵은 코르시카의 리아모네 도 대표로 오백인회 의원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당시 그는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1] 오백인회에서 그는 주로 신-자코뱅파와 함께 활동했으며, 프레리알 30일 쿠데타에 참여했다. 그러나 엠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의 영향과 이집트 시리아 원정에서의 소식은 그의 정치적 입장을 바꾸게 만들었다. 이후 뤼시앵은 형 나폴레옹총재정부를 무너뜨리고 통령 정부를 세운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의 주요 계획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799년 10월 23일, 뤼시앵은 오백인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쿠데타 당일인 1799년 11월 9일(프랑스 공화력 8년 브뤼메르 18일), 그는 파리에 자코뱅의 음모가 있다는 내용의 가짜 팜플렛을 퍼뜨렸다. 이는 의회를 파리 교외의 안전한 생클루로 옮기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이었다.[1] 다음 날인 11월 10일, 뤼시앵은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던 오백인회 회의를 주재하며 시간을 끌었다. 그 사이 나폴레옹이 척탄병들에게 둘러싸여 의사당에 갑자기 나타났다.[1] 나폴레옹은 의원들의 예상 밖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퇴장해야 했다. 이때 의사당 밖으로 나온 뤼시앵은 대기하고 있던 군대 앞에서 "'''공화국의 군대를 파괴하고 있는 피트의 하수인들을 의사당에서 쓸어버려라'''"라는 교묘한 연설을 하여 병사들을 의사당으로 돌입시켰다. 의원들은 저항했지만 곧 쫓겨났고, 쿠데타는 성공했다. 쿠데타 과정에서 뤼시앵은 만약 나폴레옹이 ''자유, 평등, 박애''의 원칙을 배반한다면 그의 가슴을 찌르겠다고 맹세하기도 했다.[1] 쿠데타 다음 날, 뤼시앵은 나폴레옹이 제1통령으로 공식 선출되도록 일을 처리했다.

3. 2. 통령 정부 및 제정 시기

1799년 10월 9일,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온 형 나폴레옹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준비했다. 당시 오백인회 의장이었던 뤼시앵은 1799년 11월 9일(프랑스 공화력 8년 브뤼메르 18일)에 파리에 가짜 자코뱅 음모가 있다는 내용의 팜플렛을 배포하여, 의회를 생클루의 안전한 교외 지역으로 이전시키는 명분을 만들었다.[1]

다음 날인 11월 10일,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오백인회 의사당에 나타나 의원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예상치 못한 저항에 부딪혀 퇴장해야 했다. 이때 뤼시앵은 격렬한 회의를 주재하며 시간을 벌었고,[1] 의사당 밖으로 나가 대기하던 군대 앞에서 "'''공화국의 군대를 파괴하고 있는 피트의 하수인들을 의사당에서 쓸어버려라'''"는 연설로 병사들의 의사당 진입을 유도했다. 의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군대는 의회를 해산시켰고,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는 성공했다. 쿠데타 과정에서 뤼시앵은 만약 나폴레옹이 ''자유, 평등, 박애''의 원칙을 배반한다면 자신의 가슴을 찌르겠다고 맹세하기도 했다.[1] 쿠데타 다음 날, 뤼시앵은 나폴레옹이 제1통령으로 공식 선출되도록 주선했다.

통령 정부 수립 후, 뤼시앵은 1799년 12월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1] 그는 초대 주지사 임명을 감독하고 1800년 2월 헌법 국민투표 결과를 조작하는 데 관여했다.[1] 그러나 파리 경찰 문제 감독 권한을 두고 경찰부 장관 조제프 푸셰와 갈등을 겪었다.[1] 푸셰는 뤼시앵이 작성했을 가능성이 있는 논란의 소지가 있는 팜플렛을 나폴레옹에게 보여주며 형제 사이를 이간질했다. 일각에서는 나폴레옹 자신이 해당 팜플렛을 작성했으나 반응이 좋지 않자 뤼시앵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주장도 제기된다.[3] 결국 뤼시앵은 1800년 11월 내무부 장관직에서 사임했다.[1]

사임 후 뤼시앵은 스페인 주재 대사로 파견되어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궁정에서 활동했다. 그의 외교적 수완은 부르봉 왕가와 당시 실권자였던 마누엘 데 고도이 장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4] 1801년 3월, 뤼시앵은 고도이와 함께 아란후에스 조약에 서명하여 프랑스의 위성국인 에트루리아 왕국을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1]

이후 호민원 의원과 원로원 의원을 역임했지만, 나폴레옹과의 관계는 계속해서 악화되었다. 특히 1803년 알렉상드린 자코브 드 브레샹과의 재혼은 나폴레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나폴레옹은 알렉상드린의 평판을 문제 삼아 결혼을 반대했고, 1804년에는 뤼시앵을 황위 계승권자 명단에서 제외했다. 나폴레옹은 뤼시앵에게 알렉상드린과 이혼하고 정략결혼을 할 것을 권유했지만, 뤼시앵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며 형과의 관계는 더욱 멀어졌다.

4. 나폴레옹과의 갈등 및 망명

1802년 호민관프랑스 제1제국원로원 의원을 역임했지만, 이 시기부터 형 나폴레옹의 정책에 점차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특히 1803년 알렉상드린 자코브 드 브레샹과의 재혼은 나폴레옹의 큰 반감을 샀는데, 알렉상드린의 평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갈등은 1804년에 불거졌다. 나폴레옹이 스스로 프랑스인의 황제로 즉위하려는 계획과, 뤼시앵을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 공주인 마리아 루이사와 정략 결혼시키려는 의도에 뤼시앵은 강하게 반발했다. 결국 그는 모든 황실의 영예를 거부하고 황위 계승권자 명단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자발적인 망명을 선택했다. 나폴레옹은 이후에도 알렉상드린과의 이혼과 정략 결혼을 계속 권유했지만, 뤼시앵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망명 후 뤼시앵은 처음에는 이탈리아 로마에 정착했으며, 이후 프라스카티에 있는 빌라 루피넬라를 구입하여 거주했다. 이 시기 그는 정치에서 벗어나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4. 1. 영국 망명

로베르 르페브르의 초상화, 베르사유 궁전


1809년, 나폴레옹은 뤼시앵에게 아내와 이혼하고 프랑스로 돌아오라고 압력을 가했다. 심지어 어머니 레티치아를 통해 아내를 버리고 돌아오라는 편지를 쓰게 할 정도였다. 교황령 전체가 프랑스에 합병되고 교황이 투옥되면서, 뤼시앵은 이탈리아 영지에서 사실상 갇힌 신세가 되었고, 영지를 벗어나려면 군사 총독의 허가가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려 했으나, 항해 도중 영국 해군에 붙잡혔다.[1] 그가 영국 땅에 도착했을 때, 군중들은 그를 형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인물로 여기며 환호와 박수로 맞이했다.

영국 정부는 뤼시앵과 그의 가족이 러들로에 편안하게 정착하도록 허락했다. 이후 그는 우스터셔주 그림리의 Thornsgrove House|손스그로브 하우스eng로 거처를 옮겨 샤를마뉴에 대한 영웅시를 집필하며 지냈다. 한편, 나폴레옹은 뤼시앵이 일부러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반역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1811년부터 1814년 나폴레옹이 퇴위할 때까지 보나파르트 가문의 제국 연감에서 뤼시앵의 이름은 제외되었다.

뤼시앵은 형 나폴레옹이 1814년 4월 퇴위한 이후에야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1]

5. 말년



나폴레옹1814년 4월 퇴위한 후, 뤼시앵은 프랑스로 돌아왔다.[1] 그는 로마로 가서 1814년 8월 18일 교황 비오 7세로부터 카니노 공작, 아폴리노 백작, 네모리 영주 작위를 받았다.[5]

이후 뤼시앵은 1824년 3월 21일 교황 레오 12세에 의해 무시냐노 공작 작위를 추가로 받았다.[5] 1836년에는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했다.

5. 1. 백일천하

1814년 로마로 이주했던 뤼시앵은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프랑스로 귀국했다. 이듬해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 섬 망명지에서 돌아와 백일 천하가 시작되자, 뤼시앵은 형의 복위를 지지하며 다시 힘을 합쳤다.[1] 나폴레옹은 잠시 권력을 되찾는 동안 뤼시앵을 프랑스 공작으로 임명하고 그의 자녀들을 황실 가족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두 번째로 퇴위하자, 부르봉 왕정복고 정부는 그의 공작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뤼시앵은 프랑스에서 추방되었고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 회원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후 그는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5. 2. 사망

1840년 6월 29일 이탈리아 비테르보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5] 이는 그의 아버지, 그리고 형인 나폴레옹도 앓았던 것과 같은 질병이었다.[5]

6. 학문 활동

뤼시앵 보나파르트는 정치 활동 외에도 문학, 예술, 고고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했다. 그는 1803년 분산되었던 프랑스 학사원의 재건에 영감을 주었으며 직접 회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그림 수집, 살롱 참여 등 예술 활동에도 관심을 보였고, 소설 《라 트리브 인디엔느》를 집필하기도 했다. 아마추어 고고학자로서 자신의 영지에서 발굴 작업을 진행하여 티베리우스 조각상, 유노 흉상,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투스쿨룸 초상화 등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6] 이러한 학문적 활동을 인정받아 1823년에는 미국 철학회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7]

6. 1. 프랑스 학사원 재건

뤼시앵 보나파르트는 1803년 분산되어 있던 프랑스 학사원을 나폴레옹 시대에 재건하는 데 영감을 주었으며, 직접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브리엔에 있는 '라 메종 드 캉파뉴'에서 그림을 수집했고, 잔 프랑수아즈 쥘리 아델라이드 레카미에의 살롱 회원이기도 했다. 또한 소설 《라 트리브 인디엔느》를 저술했다. 아마추어 고고학자로서 활동하며, 프라스카티에 있는 자신의 사유지에서 발굴 작업을 시작하여 티베리우스의 완전한 조각상을 찾아냈고, 무시냐노에서는 유노의 흉상을 발굴했다. 보나파르트는 한때 키케로의 저택 일부였던 투스쿨룸 부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이 사실을 자주 언급했다. 1825년에는 투스쿨룸의 포럼에서 이른바 투스쿨룸 초상화로 불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초상화를 발굴했다.[6]

1823년에는 미국 철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7]

6. 2. 고고학 연구

뤼시앵 보나파르트는 아마추어 고고학자로서 활동했다. 그는 프라스카티에 있는 자신의 영지에서 발굴 작업을 시작하여 티베리우스의 완전한 조각상을 발견했으며, 무시냐노에서는 유노의 흉상을 발굴했다. 보나파르트는 한때 키케로의 저택 일부였던 투스쿨룸 부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1825년 이곳의 포럼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초상화, 이른바 투스쿨룸 초상화를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6]

6. 3. 미국 철학회 회원

1823년, 보나파르트는 미국 철학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7]

7. 가족 관계

뤼시앵 보나파르트는 두 번 결혼하여 총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첫 번째 아내는 크리스틴 보이에르(1771년 ~ 1800년)로, 생 막시맹 라 생트 봄에 있는 여관 주인의 딸이자 뤼시앵의 집주인이었다.[8] 그녀와의 사이에서는 네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크리스틴 보이에르가 사망한 후, 뤼시앵은 알렉상드린 드 블레샹(1778년 ~ 1855년)과 재혼했다. 그녀는 "마담 주베르통"으로 알려진 이폴리트 주베르통의 미망인이었다.[9] 알렉상드린과의 사이에서는 열 명의 자녀를 두었다.

7. 1. 첫 번째 결혼: 크리스틴 보이에

그의 첫 번째 아내는 크리스틴 보이에르 (1771년 7월 3일 – 1800년 5월 14일)였다.[8] 그녀는 생 막시맹 라 생트 봄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주인의 딸이자 뤼시앵의 집주인이었으며,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다. 뤼시앵은 그녀와의 사이에서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생몰년비고
필리스틴 샬롯1795년 11월 28일 – 1865년 5월 6일마리오 가브리엘리 왕자(가브리엘리)와 결혼했다.
(사산아들)1796년 3월 13일
빅투아르 게르트루드1797년 7월 9일태어난 당일 사망했다.
크리스틴 샬롯 알렉상드린 이집트1798년 10월 18일 – 1847년스웨덴 귀족 아르비드 포세 백작과 결혼했으나 이혼했고, 이후 영국의 더들리 스튜어트 경과 재혼했다.


7. 2. 두 번째 결혼: 알렉상드린 드 블레샹

그의 두 번째 아내는 알렉상드린 드 블레샹 (1778년 2월 23일 – 1855년 7월 12일)으로, "마담 주베르통"으로 알려진 이폴리트 주베르통의 미망인이었으며,[9] 그녀와의 사이에서 열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생몰년비고
샤를 루시앵 보나파르트1803년 5월 24일 – 1857년 7월 29일박물학자이자 조류학자. 사촌 제나이드와 결혼.
레티지아1804년 12월 1일 – 1871년 3월 15일토마스 와이즈 경과 결혼.
조제프1806년 6월 14일 – 1807년 8월 15일요절.
1807년 7월 22일 – 1829년 9월 22일오노레 오노라티 후작과 결혼.
폴 마리1809년 11월 3일 – 1827년 9월 7일요절.
루이 루시앵1813년 1월 4일 – 1891년 11월 3일언어학자이자 정치인, 바스크어 전문가.
피에르 나폴레옹1815년 10월 11일 – 1881년 4월 7일
앙투안1816년 10월 31일 – 1877년 3월 28일카롤리나 마리아 안나 카르디날리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마리 알렉상드린1818년 10월 10일 – 1874년 8월 20일빈첸초 발렌티니, 라비아노 백작과 결혼.
콩스탕스1823년 1월 30일 – 1876년 9월 5일수녀.



증손녀인 마리 보나파르트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학의 권위자였으며, 엘리자베스 2세왕배에든버러 공작 필립의 고모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크 라캉과 대립했다.

8. 평가

뤼시앵은 17세 때 이미 23세가 된 형 나폴레옹을 평하며 "나폴레옹은 전제 군주가 될 자질이 있으며, 왕위에 오르면 독재자가 될 것"이라고 그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고 한다.

참조

[1] 웹사이트 Lucien Bonaparte (Prince of Canino), 1775-1840, Minister https://www.napoleon[...] Fondation Napoléon
[2] 웹사이트 Napoleon Bonaparte During the Early French Revolution (1789-1794) https://www.worldhis[...] 2022-07-14
[3] 서적 Napoleon: A Life Told in Gardens and Shadows Liveright 2021
[4] 서적 Napoleon Bonaparte HarperCollins Publishers 1997
[5] 서적 The Emperor of Nature: Charles-Lucien Bonaparte and his world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00
[6] 서적 Ancient Portraits in the J. Paul Getty Museum: Volume 1 Getty Publications
[7] 웹사이트 APS Member History https://search.amphi[...] 2021-04-06
[8] 서적 Memoirs of Napoleon Bonaparte Charles Scribner's Sons:New York 1895
[9] 서적 Napoleon's brothers Methuen and Co.:London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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